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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해 알아볼까요?

by 피스-코스모스 2022. 9. 15.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의 여왕입니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알렉사더라 메리이며, 호칭은 영국 연방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폐하입니다. 1952년 2월 사망한 조지 왕의 이어 왕이 되었고 최근 9월 8일 사망하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영국뿐만 아니라 영국 연방은 인구가 1억 2900만 명이 넘지만 정치에는 개입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전 세계 왕 중 가장 나이가 많았고, 최고 오래 재위한 군주였으며 빅토리아 여왕에 이어 영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 근무한 여왕이 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26년 4월 21일 런던 메이페어서 요트 공 앨버트와 요크 공 장부인 의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버킹엄궁의 개인 예배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어머니 이름을 가지되 영국 왕실 상징으로 엘리자베스 중간 이름으로 증조모 알렉산드라 왕대비와 조모 메리 왕비의 이름을 따와 중간 이름으로 지명되었습니다.

자매는 마거릿 공주인데, 1930년에 태어났으며 어머니가 엘리자 배스와 같이 교육했다고 합니다. 가정교사는 매리언 디 아가로 이튼 칼리지의 학장과 함께 역사 공부를 했으며, 현대 언어도 많이 알았으며 특히 프랑스어를 잘했다고 해요. 

엘리자베스는 영국 국왕의 손녀로서 전하라는 호칭과 함께 영국 공주도 함께 보유했다고 해요. 그의 아버지는 국왕을 둘째 아들이었고, 그의 백부 에드워드가 웨일스 공이 되어 장차 왕위를 약속 받았기 때문에, 비록 그의 출생이 대중의 관심을 받았기는 했지만, 웨일스 공이 추후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새로 왕위를 계승할 것으로 생각했기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였다고 해요.

하지만 에드워드는 자식이 없는 채 사망하고 말았고, 그의 아버지 조지 6세로서 왕위에 올랐다고 해요. 그때부터 엘리자베스는 차기 왕위 계승자가 되어 본격적으로 인계작업을 했다고 해요. 빡빡한 교육 일정에서 스트레스는 푸는 유일한 길은 시골길을 말 타고 다니는 거였다고 해요. 예나 지금이나 왕으로서 막중한 임무 때문에 정상인으로서 삶은 많이 포기해야 하는 거 같아요. 

 

 

 



엘리자 배스의 특이한 면은 군 복무에 있어요. 엘리자 배스는 20살 때 직접 전쟁에 참여하고 싶다고 자발적으로 말했다고 해요. 아버지 조지 6세는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계속된 딸의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고 합니다. 노블레스 노블리제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가 선조는 피난 갔지만 광해군은 남아서 계속 의병투쟁을 한 것처럼 위기 상황에서 국가 리더의 리더십과 판단력은 상징적 의미를 넘어서 많은 사람에게 희망이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엘리자 배스는 영국 여자 국방군에게 입대하여 구호품 전달 업무를 하였습니다. 비전투 부서였으나, 전쟁 시에는 운전, 탄약 관리 등 전투 업무도 했다고 해요. 엘리자베스는 여기서 군용트럭을 모는 운전사로 근무했다고 해요.

외국은 신기한 게 우리나라는 군대 가서도 특권을 누리려고 많이 노력하잖아요. 연예병사라든지, 편한 보직으로 빠진다든지.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운전하고 탄약 관리 임무를 수행했다고 해요. 차량을 고친다든지 트럭 바퀴를 고치고, 엔진을 수리하는 등 계급은 어쩔 수 없이 장교였지만 병사들의 업무를 같이했다고 합니다. 

이는 영국에서도 다른 병사들과 동등하게 훈련받고 군 복무까지 한 사람은 엘리자배스가 처음이라고 합니다. 

엘리자 베스가 여왕으로 즉위 하였을 때,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은 승리하였지만, 세계 각국에서 즉, 인도, 실론, 말라야, 미얀마, 이집트, 짐바브웨 등 줄지어 독립함으로써 영국의 위상은 많이 내려가고 있었어요. 이에 영국 연방 자체가 와해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엘리자베스는 영국 연방을 하며 유대감을 강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인도에도 방문하고 각 연방에도 방문하여 활발하게 외교활동을 하였는데요 정치적 권력은 없지만 노력으로 영국의 위상을 크게 높이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는 왕으로서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을 많이 꺼렸다고 해요.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 않음으로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간접적으로 포클랜드 전쟁을 할 때에 앤드루 왕자가 전투기 조종사로 전쟁에 참여해야 부모로서 매우 걱정된다는 말로 간접적으로 전쟁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하였다고 해요. 예전에 전쟁에 참여했던 경험으로 얼마나 전쟁이 처참하고 무서운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고, 여왕으로서 신중하고 간접적으로 정치적 표현은 국민이 더욱 신뢰를 쌓게 하였습니다.

명예혁명 이후 국왕은 내정에 간섭할 수 없었고, 내각에서 불신임을 받았을 때 총리 지명권이 있지만, 이 또한 엘리자베스는 포기하였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는 총리를 만나 정치를 의논하였는데 남다른 통찰력으로 세계정세를 파악했다고 해요. 또한 각 기관과 지역을 방문하고, 600개가 넘는 자선단체를 후원하였다고 해요. 그런 엘리자베스도 자식을 어떻게 할 수 없었나 봐요.

딸인 앤 공주가 평민과 결혼하여 왕실의 권위를 떨치기도 하고, 결국 이혼하여 국민은 더 실망했다고 해요.

 

 

 

 

 


웨일스 공 찰스와 다이애나의 결혼으로 왕실에 대한 인기가 다시 높아지기는 하였지만 다이에가 그의 연인과 함께 있다가 파파라치를 따돌리려다가 사고사하게 되는데요. 국민들은 찰스를 원망하게 되고, 다이에나의 책이 출간되자 영국 왕실을 폐지하자는 말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수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는 훌륭하게 대처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혜롭게 행동하여 왕실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차후 왕위에 오른 찰스 3세는 과연 어떤 행동을 보여줄까요? 과연 위기의 영국 왕실을 지킬 수 있을까요?

권력이 없는 왕위를 상징적인 의미로써 지혜로운 역활을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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